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시프 스탈린/생애 (문단 편집) == 말년 == [[파일:attachment/마오쩌둥/1949_Mao_and_Stalin.jpg]] 1949년, 스탈린의 생일파티 당시 모습[* 오른쪽부터 [[몽골 인민 공화국]]의 당 서기장 [[욤자깅 체뎅발]],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의 부수상 [[발터 울브리히트]], 그리고 '''본인''', 소련의 국방장관이자 총리인 [[니콜라이 불가닌]],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인 [[마오쩌둥]],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 스저(师哲).] [youtube(kfq4V86dYq8)] 당시 영상.[* 연단에 앉아있는 사람은 맨 앞부터 정치국 위원인 [[니키타 흐루쇼프]], 스탈린 본인, 중국의 [[마오쩌둥]],[[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의 1서기인 [[라자르 카가노비치]] ]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1949년, 스탈린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70살 [[노인]]이 되었다. 그의 70세 생일은 [[마오쩌둥]], [[호찌민]] 등등 전 세계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모두 참여한 화려한 기념식이었다. 단순한 생일 파티를 넘어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소련의 위광을 드러냄과 동시에 스탈린이 공산주의 세계의 황제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거대한 정치 행사나 다름없었다. 보통 굉장히 미화된 초상화와 [[사진]]을 통해서 스탈린을 알고 있던 각국의 지도자와 참석자들은 이날 스탈린의 노쇠한 모습에 굉장히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스탈린은 초상화와 달리 나이를 먹는 인간이었으니까. 말년이 되자 스탈린의 정신과 육체는 점차 쇠약해져갔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업무는 스탈린의 결정을 기다려야만 했다. 결국 정부의 기능은 점차 마비되어갔다. 스탈린은 점차 게을러지고, 행동이 조잡스러워졌으며 자주 화를 냈다. 스탈린은 스스로를 '''무례한 늙은이'''라고 불렀다. 스탈린의 집무실에는 밤새도록 창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왔으나, 그것은 인민들에게 그가 아직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술책이었다. 스탈린은 점차 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가 크렘린을 떠날 때면 늘 3,000명 이상의 경호원이 따라붙었다. 5대의 리무진에는 철판을 대고 방탄 유리를 끼웠으며, 차창에는 항상 커튼이 늘어져 있었다. 원래 스탈린은 의심이 많았던 독재자이지만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의심도 배로 더 늘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충실한 충복들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까 의심했고[* 실제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죽고 후임 서기장이 된 후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하면서 제대로 배신을 했다.] 그들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스탈린의 모든 주변인들은 스탈린이 너무 늙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의심 많은 스탈린 앞에서 정신이 머리에서 가출하지 않는 이상 감히 후계자 이야기를 꺼내는 무모하고 정신 나간 인간들은 없었다. 특히 그 누구든지 자신을 위협할 권력을 가질 경우 이 늙은 콧수염 [[대마왕]]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심지어 후계자를 노릴 만한 권력을 갖지 못한 측근들도 항상 스탈린이 자신을 숙청할지 몰라 살얼음판을 걷는 생활을 했다. 사실 말년의 스탈린은 격무에 지쳤기에 은퇴해서 쉬고 싶었지만, 은퇴할 경우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워낙 [[대숙청]]으로 수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쓸어버린 그였기에 이러한 불안은 사실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잡고 있지 않는다면 무슨 보복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물론 이렇게 일을 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매우 지치고 늙은 상태였기 때문에 옛날처럼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기는 힘들어서 말년에는 일도 대충대충 하고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만찬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말년에 주변 인물들을 떠보기 위해 자주 [[은퇴]]를 거론하긴 했다. 하지만 그가 은퇴의 뜻을 비치면 아첨이 예술에 경지에 이른 측근들은 펄쩍 뛰면서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스탈린이 없는 소련은 존재할 수가 없다]]'''면서 그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넌씨눈|그러나 가끔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인간도 있었는데]], [[주치의]]였던 비노그라도프가 건강을 위해 은퇴를 제안하자 격노한 스탈린이 그를 처벌했던 것이다. [[답정너|심지어 그러면서도 스탈린은 자신의 은퇴를 계속 의제로 삼고 회의를 했다.]] 스탈린 강철 권력에 의하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손 안에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과 같았다는 서술을 했다. 한편 스탈린은 미코얀, 몰로토프,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 베리야 등의 여러 고위 정치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언제든지 숙청될 수 있음을 계속 경고했다. 특히 베리야는 자신이 [[겐리흐 야고다|전임]][[니콜라이 예조프|자들]]처럼 숙청될 것이라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몰로토프의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유대인으로서 반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며, 여러 가지 경고를 통해 스탈린은 자신의 주변에서도 공포 정치를 유지했다. 특히 독소전쟁 이후 회복되지 않는 민생 경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자 스탈린은 이를 구실로 군부 내부의 숙청을 감행했고 레닌그라드 사건을 일으켜 전 국가계획위원장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 등을 총살했으며, [[이스라엘]]이 친미로 돌아서자 시오니즘 음모론 운운하면서 소련 내부의 [[유대인]] 거물들을 차례로 숙청해 버렸는데 소련 반파시즘 유대인 위원회의 위원장 솔로몬 미호옐스를 자동차로 들이받아 버리고 나머지 유대인 지도자들도 줄줄이 총살시켜 버리는 등 스탈린의 공포 정치는 끝을 몰랐다. 나중에는 최측근인 경호 책임자 블라시크와 비서실장 포스크레비셰프마저 숙청당했다. >지금 [[윈스턴 처칠|처칠]]네, [[해리 S. 트루먼|트루먼]]네, 번스네의 칭찬을 들으면 아이처럼 기뻐 어쩔 줄 몰라하고, 거꾸로 이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은 뒤에는 용기를 잃어버리는 많은 이들이 권위 있는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우리 대열 속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무조건 비굴하게 구는 노예 근성을 낳기 때문에 위험한 태도입니다. 외국인들에게 굽실거리는 이 노예 근성에 맞서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말년에는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서방에 너무 나약하다는 이유로 그들이 서방 스파이라는 망상에 시달렸고 그들을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코얀과 몰로토프와 친했던 흐루쇼프와 동료들은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숙청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탈린이 자신의 최측근들만을 불러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 그들을 동참시켜 다시 스탈린의 신임을 얻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스탈린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는데, 스탈린은 특별히 누군가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말렌코프를 노려보며 "우리가 영화를 관람할 때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이 오는 이유를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당장 그만둬! 또 다시 그런 짓을 했다간,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어!"라면서 그들에게 화를 냈고, 결국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모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선 스탈린이 독소전쟁 발발 때 저택에서 자신의 허약한 모습을 본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거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본 것이 싫어서 그랬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여튼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싫어졌던 이유는 위에서 베리야가 말했던 대로 스탈린의 나약한 모습을 본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흐루쇼프가 자서전에서 밝혔던 대로 그 이후에 스탈린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지 않았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숙청당했을 것이다. 이 밖에 스탈린의 말년에 대한 내용은 흐루쇼프가 회상한 스탈린의 말년 글에 잘 나와있다. * [[http://egloos.zum.com/epoque/v/3616560|흐루쇼프가 회고한 말년의 스탈린 (1)]] * [[http://egloos.zum.com/epoque/v/3617236|흐루쇼프가 회고한 말년의 스탈린 (2)]] * [[http://egloos.zum.com/epoque/v/3618072|흐루쇼프가 회고한 말년의 스탈린 (3)]] 스탈린의 이러한 의심은 외국 지도자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 루돌프 슬란스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미국 간첩으로 몰려서 백주대낮에 총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헝가리 근로인민당 서기장 라코시 마차시는 스탈린의 휴가에 매번 따라온다는 이유로 감히 스탈린에 대한 정보를 캐고 다니는 불순한 놈으로 스탈린의 의심을 샀는데 사실 라코시는 그냥 소련 공산당에 스탈린이 어딨냐고 물었고, 서기국이 솔직하게 말해준 것 뿐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의심이 극에 달한 스탈린은 자신의 주치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왜 갑자기 스탈린이 주치의들을 의심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아마도 [[몽골 인민 공화국]]의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죽음이 꽤나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1952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는데, 그를 무척이나 아꼈던 스탈린은 처이발상의 죽음은 주치의들이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스탈린이 의사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다가 위에서 말했듯이 주치의였던 비노그라도프가 자신의 하야를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스탈린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고, 스탈린은 그들을 숙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흐루쇼프는 그때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스탈린은 우리들에게 티마슈크라는 여의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주었다. 내용은 [[안드레이 즈다노프|즈다노프]]가 고의적으로 부당한 진료를 받아 사망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 편지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편지 내용이 단 10%라도 진실이라면, 그 전체를 사실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른바 '흰 가운을 입은 암살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크렘린 소속 의사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스탈린은 당시 국가보안상인 세묜 이그나티예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들겨 패! 두들겨 패! 두들겨 패라고! 그놈들을 가루가 되도록 짓이겨버려! 만약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머리 하나만큼 네놈의 키를 줄여주겠어!"[*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이 발언을 20차 당대회에서 공개하자 대회장 전체가 분노로 술렁였다. 다만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말년에 누구도 믿지 않고 맛이 갔다는 분석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스탈린이 이런 막말을 했다는 흐루쇼프의 주장에 대해서는 자신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사실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표했다. 물론 몰로토프가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였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저딴 식으로 스탈린이 갈궈대니 의사들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는 뻔히 알 만하다. 결국 소련의 의료 엘리트들은 차례대로 체포되었고, 이들은 고문을 못 견디고 있지도 않은 음모를 자백했다. 스탈린은 흐루쇼프를 비롯한 정치국 위원들을 불러모아 의사들의 거짓 자백서를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새끼들아. 너희는 눈이 멀었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나. 너희가 적을 구분할 줄도 몰라서 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다! 이 사건은 제2의 대숙청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었지만 스탈린의 사망으로 인해 크게 번지지는 못했다. 이렇게 주치의들을 숙청해서 스탈린의 명줄이 더 짧아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스탈린의 뇌출혈은 당시 의료 수준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며 잘해봐야 정무도 제대로 못보는 상태로 조금 더 산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